본문 바로가기
COLLECTION

어린시절 옛생각

by 이미행복 2020. 6. 11.












서울 중림동 1991











'네가 감히 누나한테 대들어'라고 하는 듯한 누나의 당당한 모습, 그리고 궁지에 몰린 이 소년의 절박한 표정이 재미있다.





서울 중림동 1984




 



















1972. 12.












 





















서울 문래동 .1969. 6.


1972. 7. ​




1970. 9.


골목은 삶의 공간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생계를 위한 난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골목은 누구의 것이 아닌 살려는 사람들의 공유물이었다. 골목 한켠에 수레도 없이 그저 바닥에 주저 앉아 풀빵을 구워 파는 서민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풀빵을 혼자 사먹기는 어렵다. 대개 나누어 먹게 된다. 은밀하게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이러한 풀빵을 배를 채운 아이들은 모여 논다. 골목은 아이들이 함께 마음 껏 뛰어 노는 놀이공간이다. 스마트폰과 같은 기계와 하는 게 아니라 사람끼리 부딪히는 놀이를 하였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편을 나누어 하는. 그런 가운데 친구를 사귀고 도움의 의미를 깨닫는다. 함께 하는 즐거움을 얻는다. 역할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고 이러한 경험들을 동생들에게 이어가게 한다.













행당동.1988.





서울 중림동. 1977.4.






 
 





< width="98%" height="150" align="center" "__se_tbl_ext" "margin: 0px auto; padding: 0px; font-size: 14px; line-height: 20px; font-family: Helvetica-Light, HelveticaNeue-Light, "Helvetica Neue Light", 나눔고딕, nanumgothic, AppleSDGothic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sans-serif; border-collapse: collapse; color: rgb(255, 170, 0); -webkit-text-stroke-width: 0.04px;">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인 고무줄 놀이
 
남자아이들은 줄을 끈어 먹는 재미로 동참(?)한다. 고무줄이 의복에 널리 사용된 것은 해방 이후로 보여 진다. 당시 동네나 시장에는 고무줄만 종류별로 가지고 다니면서 팔던 상인들이 있었다. 내의 등 여러 의류에 사용되거나 빨래줄로도 사용하는 등 다용도였던 고무줄은 훌륭한 놀이도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Huizinga)는 놀이가 문화와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놀이의 특징으로 자유, 상상력, 무의식성을 들고 있다. 나아가 놀이는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이상과 공동생활이라는 이상을 만족시키는 생의 기능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놀이문화가 골목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저 깨끗하게 정비된, 보기 좋게 단장된 길은 골목이 아니다. 골목은 미이라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낮에는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의 생소리가 퍼져 나가는 곳이다, 저녁이면 밥하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 아이들 밥먹이러 부르는 소리가 넘치는 곳이다. 한밤중에는 연인들의 속삭임이 골목 깊숙한 곳에 배여 드는 그런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런 살아있는 골목이 그립다.
 




 











버튼식으로 쌀이 나오던 옛날 쌀통...쌀벌레가 잘 생겨서 자주 청소를 해줘야 했었죠.




동네에 가끔 들르시던 고물 수리 아저씨...가위나 칼, 구멍 난 냄비 따위를 고쳐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 중림동. 1983. 8.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서울 중림동. 1982.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기 시작한 아파트 건설 붐으로 인해 서민들이 밀집해있던 달동네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철거되기 일수였다.






재개발을 앞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소꿉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눈망울은 그저 맑기만 하다.




서울 공덕동. 1980.3.















서울 사근동. 1974. 12.

 




80년대의 어린 시절에는 놀이문화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딱지 치기나 조립식 만들기, 구슬치기 정도가 그나마 가장 주된 놀이문화였다. 이른바 뷰 마스터라 불리던 신기한 그림들을 보여주는 할아버지가 골목길에 나타나면 엄마를 졸라 100원을 가지고 달려가곤 했다.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입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다.착한 친구들은 마지막 몇 장을 못 본 친구에게 양보하기도 했었다. 





​서울 행촌동. 1975.5.







 
서울 사근동 뚝방초. 1976.2.

















 


 



















 














 












서울 중림동. 1988.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v:f eqn="if lineDrawn pixelLineWidth 0" /> <v:f eqn="sum @0 1 0" /> <v:f eqn="sum 0 0 @1" /> <v:f eqn="prod @2 1 2" /> <v:f eqn="prod @3 21600 pixelWidth" /> <v:f eqn="prod @3 21600 pixelHeight" /> <v:f eqn="sum @0 0 1" /> <v:f eqn="prod @6 1 2" /> <v:f eqn="prod @7 21600 pixelWidth" /> <v:f eqn="sum @8 21600 0" /> <v:f eqn="prod @7 21600 pixelHeight" /> <v:f eqn="sum @10 21600 0" /> <o:lock v:ext="edit" aspectratio="t" /> <w:wrap type="topAndBottom" /> 


서울 중림동. 1990.










말뚝박기

 엎드린 친구를 두 명의 마부가 끌고, 말은 움직이면서 발로 적들의 공격을 저지시키고자 한 놀이를 말타기라 하였다. 전봇대나 벽에 기대어 있는 친구의 역할이 컸다.















넝마주이로 불리던 고물 줍는 아저씨. 거지라고 놀림도 받았지만 어느 이름 모를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길 위에서 삶을 보내신 부모님의 노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뒷골목, 그 씁쓸함을 담은 작가


 

사진작가 김기찬은 1960년대 말부터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를 오가며 삶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찍었다. 중림동에서 시작된 골목 사진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 하며 평생의 사진테마가 됐다. ‘골목 안 풍경’은 단순히 골목의 풍경을 찍는 것이 아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따뜻한 눈길로 담고 있다.

 
서울 중림동에서 시작된 그의 골목길 사진 여정은 만리동, 공덕동, 왕십리, 사근동의 뚝방촌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이 어른으로, 어른들이 노인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개발 지상주의로 사라져가는 뒷골목의 풍경,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 등을 기록해 우리 사회의 명과 암을 보여준 김기찬은 진실되고 일관성 있는 사진작업으로 2002년 이명동 사진상과 2004년 동강사진상 국내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골목의 생생한 풍경들을 담은 그의 사진은 겨우내 얼어 있던 몸을 녹여주는 봄바람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싼다.


‘골목에 들어서면 늘 조심스러웠다. 특히 동네 초입에 젖먹이 아기들을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은 동네에서 쫓겨나기 알맞은 행동이었다. 사실 젊은 엄마들을 찍을 수 있었던 시기는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해 사진 찍는 행위가 그들의 생활 속에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나는 자연스레 골목 안 사람이 되어갔고 그들도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의논 상대로 생각해주기도 했다.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의 테마는 골목 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 안 풍경, 이것이 내 평생의 테마이다’라고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러한 나의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


골목과 함께 사라지다


김기찬, 그가 바라보는 골목에는 삶이 재현돼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진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작가의 마음이 따뜻해야 비로소 사진이 온기를 발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한편 골목은 그의 자서전 일부이기도 하다. 그가 자란 곳이 이러한 골목 안이었기 때문.

 

그래서 그의 사진이 유독 정겨운 것은 그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부른 향수의 노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작가와 대상이 제대로 만났을 때 태어나듯이 골목 안 풍경과 김기찬은 최고의 조합이었다.

 
한정식 중앙대 명예교수는 “그의 죽음은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라며 골목이 거의 다 사라져 그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라 밝혔다. 골목길이 사라짐에 따라 무엇을 찍어야 할지를 고민하기도 했다는 것. 심지어 종로 뒷골목을 뒤져가며 젊은이들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그는 낯선 타국의 느낌을 받는 것처럼 느꼈다고 전했다.

 

“가면처럼 진한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젊은 남녀들이 득시글거리는 그 거리는 그에게 외국과 마찬가지였다. 그 따스한 골목 안은 그의 운명이요, 사라진 골목은 그의 숙명이었나 보다”라며 김기찬 사진작가와 골목과의 긴 인연을 떠올리기도 했다. 또한 한정식 교수는 “예술가가 태어나 한 가지 작품을 남기겨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법이다. 김기찬은 골목 하나에 평생을 바쳤고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게 된 것”이라 전하며 “그는 너무도 부러운 작가다”라고 전했다.

사라진 뒷골목의 쓸쓸함을 닮은 김기찬 작가.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들은 이곳에 남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골목길들을 잇고 있다. 굽이치는 골목 속에 흐르는 정은 그 길을 따라 넘친다. 희미해진 기억 속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 보자.    

[인터넷 대한뉴스] 글 이선아 기자 





김기찬의 골목안 


잃어버린 풍경





이 책 속의 '그리운' 사진 풍경들은 정확히 말하면 1967년에서 1988년까지 22년 동안 저자가 흑백필름에 담은 것들이다. 그러고 16년 뒤인 2004년 9월 들어서 비로소 책으로 펴내게 되었으니, 독자들에게 예술가의 창조물을 내보이기까지에는 상당히 내밀한 고뇌의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상상된다.






논을 가는 농부 저 멀리로 바라보이는 아파트도 이제는 구식이다.

< width="40" align="center" "__se_tbl_ex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margin: 0px auto; padding: 0px; font-size: 14px; line-height: 20px; font-family: Helvetica-Light, HelveticaNeue-Light, "Helvetica Neue Light", 나눔고딕, nanumgothic, AppleSDGothic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sans-serif; border-collapse: collapse; color: rgb(255, 170, 0); -webkit-text-stroke-width: 0.04px;">

무엇이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사진예술가를 '잃어버린 풍경'이라는 영원한 화두 속으로 끌어들였던 걸까? 마침 이 사진집에 수록된 '내 마음의 풍경'이라는 김기찬의 수필 한 편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유년시절 외가의 농촌 마을이나 피란시절 가난했던 시골 생활이 아직도 마음 속에 아름다운 고향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복잡하고 각박해진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내지 5쪽)

그의 유년시절은 왜정 말기였다. 그의 외가는 통일로를 북쪽으로 따라가다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있는 공릉 안길에서 5리쯤 더 들어가야 간신히 찾아갈 수 있는 파주군 조리면 장곡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릉 안길 5리쯤에 서 있는 서낭당 마루턱에서 내려다보면 큰 개울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울 건너 멀리 보이는 팔십여 호의 농촌 마을이 바로 턱골이다.

유복자였던 외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하여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턱골 외가에는 저자의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시어머니 두 분만이 적적하게 사셨다. 그래서 저자의 어머니는 저자를 데리고 외가에 자주 가시곤 했다.

그때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목탄차. 목탄버스 뒤에 매달아 놓은 통 안에 참숯을 넣고 풍구를 돌려 불을 피워야 움직이는 그 작은 만원버스는 힘이 너무나 약해, (지금의 독립문 뒤에 있는) 무악재를 넘으려면 노약자만 남겨 놓고 승객들 모두가 내려서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야 할 정도였다.

공릉 앞 큰 행길에서 어머니 손에 매달려 능 안길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서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렸고, 턱골 마을은 저녁연기가 온 마을을 감싸안고 있었다. (내지 5쪽) 




 오래된 초가와 고목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아름답다.



그렇게 찾아간 유년시절의 저자는, 가사(家事) 때문에 서울로 돌아간 어머니가 자기를 데려올 날을 기다리는 동안, 마을의 또래 아이들과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고, 어머니를 보고 싶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외증조 할머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해방되고 몇 년 뒤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때 피란을 가지 못하고 겪는 어려운 시절에 이어, 1.4후퇴 때 온양 구읍으로 피란을 가서 소년 시절의 저자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꾼 시절을 보낸다.



아침이면 피란민들이 줄을 지어 땔감을 찾아 삼십여 리나 되는 광덕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아버지는 부산으로 떠나셨고, 어린 나는 나무꾼 대열에 끼어들었다. 드문드문 산 중턱의 초가 마을은 그 정취를 더했다.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다 배가 고파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을 모아 마셨던 그 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6~7쪽)



주리고 힘든 생활을 보낸 뒤에 서울로 돌아와 중학생이 된 저자는 우연히 월북작가 이기영의 '고향'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는데, 그 무대가 바로 이기영의 고향인 모산이요, 그 모산은 저자가 피란시절에 나무를 하며 머물렀던 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장이었다. 이기영의 소설에 나오는 광덕산의 싸리버섯 등 이런저런 농촌 이야기는 중학생 김기찬을 매료시켰다.



사진예술가 김기찬의 유년시절 외가나 소년시절의 온양 구읍 광덕산은 그가 나이를 먹어도 잊히지 않는 장소들로 저자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어느덧 마음에 큰 밭을 이루어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제삿상을 차리기 위해 빈대떡을 부치는 고골의 할머니.  


그래서 그는 서울역 앞의 행상과 골목안 사진을 찍으면서도 힘들고 외로울 때면 경기도 일원, 오류동, 소사, 중동의 농촌 마을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덕소에서 쪽배를 타고 강 건너 미사리,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상사창리(고골)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 취재와 촬영 여행들이 '내 어린 날의 추억을 되뇌어 보려는 심사였는지 모르겠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는 1970년 중반쯤 잠실로 이사를 왔는데, 거의 농촌이나 다름없던 아파트 단지 주변의 허허벌판은 날이 갈수록 도시화해 콘크리트 건물 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김기찬은 말한다. 
석촌동, 송파, 방이동, 오금동… 우연히도 그 주변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해 나뒹구는 망부석을 보았다. 한둘이 아니었다. 묘의 봉분도 주저앉았다. 초등학교 시절 도심을 떠난 먼 소풍길에서 보았던 그 육중했던 망부석이 묘 속의 주인을 지키다 본인마저 생명을 다한 것이다.



멀리서 아파트가 쳐들어오고 있었다. 새벽 별이 지면 동이 트던 동산도 아파트에 가려졌다. 해 지던 서산은 괴물 같은 기계덩어리가 깔아뭉개 버렸다. 나는 그날 망부석의 소리 없는 죽음을 보고 잠실 주변이 도시화해 가는 모습을 기록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서울 88올림픽이 결정된 후 그 속도는 더해 가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변하고 사라질 것인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존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

한편 김기찬은 2002년 제3회 이명동사진상 수상, 2003년 사진집 <역전풍경>(눈빛 발행)으로 제34회 백상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출판상, 2004년 동강사진문화상을 받았다.

< width="40" align="center" "__se_tbl_ex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margin: 0px auto; padding: 0px; font-size: 14px; line-height: 20px; font-family: Helvetica-Light, HelveticaNeue-Light, "Helvetica Neue Light", 나눔고딕, nanumgothic, AppleSDGothic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sans-serif; border-collapse: collapse; color: rgb(255, 170, 0); -webkit-text-stroke-width: 0.04px;">

이 고장 저 고장을 떠돌며 살아온 나는 사실, 태어난 고향에만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 사람이다. 가령 '북녘에 두고 온 내 고향땅을 죽기 전에 꼭 한번 밟고 싶소'하고 소원을 비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에 가슴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 태어난 곳뿐이랴'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리운 땅을 참 많이도 가슴에 지니고 산다. 내가 태어난 호반의 도시 강원도 춘천뿐만 아니라, 남한강이 깊은 숨결로 흐르는 아버지의 고향 충청북도 제천, 춘천에 살 때 방학 때면 자주 놀러오곤 하던 서울 창신동 빈민가, 내가 첫 직장 생활을 하던 경기도 수원, 사슴 키우던 집에 세들어 살던 집이 있던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과 통일로…. 이 모든 곳을 나는 그리워하는 것이다.
 

< width="40" align="center" "__se_tbl_ex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margin: 0px auto; padding: 0px; font-size: 14px; line-height: 20px; font-family: Helvetica-Light, HelveticaNeue-Light, "Helvetica Neue Light", 나눔고딕, nanumgothic, AppleSDGothic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sans-serif; border-collapse: collapse; color: rgb(255, 170, 0); -webkit-text-stroke-width: 0.04px;">

이 책의 말미에 이르면 제13회 전태일문학상(총선 선거운동상황을 기록한 '선대본 일기'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특별상을 받은 문학상) 소설부문 심사위원인 공선옥의 글맛도 볼 수 있다. 김기찬의 사진을 보듯이 진지하게 다가서서 읽어야 할 '사진집 감상문'이 꽤 여러 쪽 담겨 있는 것이다.

공선옥은 글의 말미에서 "김기찬 선생의 사진들에서 나는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집과 그래도 내가 열망할 수밖에 없는 집을 본다. 그래서 내게 이 사진집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꿈,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열망할 수밖에 없는 꿈에 관한 기록으로 '읽힌다'"고 말했다.

자신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소중한 땅들에 대해 무심했던 사람들, 이 책 <잃어버린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라. 날로 인정이 사라져 가는 각박한 21세기 정보사회, 콘크리트 사회 속에서, 당신이 잃어버렸던 소중한 추억들이 어느 순간, 강바람에 살며시 엎드렸다 일어서길 반복하는 잔잔한 강 물결이 되어 '어머니 목소리'처럼 편안하게 피어오를 테니까. 
 


골목 풍경 사진작가 김기찬(66)씨가 서울 석촌동, 방이동, 오금동 잠실 주변과 수도권 일대의 ‘잃어버린 풍경’(눈빛출판사) 30년을 사진으로 담았다. 개발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할 무렵인 20~30년 전 서울 강남 주변의 풍경은 정겹고 아름답다. 풍성해서가 아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그 시절의 가난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미덕” (소설가 공선옥)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하나둘씩 세워지면서 황폐해져 가는 강남의 마을들을 사진으로 돌이켜 보는 마음은 무겁다.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 풍경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꿈, 그러나 살아있는 한 열망할 수밖에 없는 꿈”

 


부천시 [Bucheon-si, 富川市] , Korea, 1976.







서울 송파구 삼전동 1981 .


논밭을 없애고 들어선 아파트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습이 안쓰럽다.  






 주인잃은 망부석(1981년 4월 서울 강동구 고덕동)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하는 아파트…주인잃은 망부석…결국 봉분의 주인공도 먼 길을 다시 한번 떠났다




 ‘ㅇ’자 초가집(1978년 6월 서울 은평구 수색동(화전))


수색에서 버스를 내려 화전을 지나다 마주친 ‘ㅇ’자 초가집. 어색하게 카메라를 마주하던 할머니와 손녀딸. 머리 위로 뚫린 초가지붕, 하늘, 새…  원형 초가집의 이 둥근 아름다움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모두 이장하세요”(1982년 3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파헤쳐진 선산, 이장을 앞둔 이 무덤의 후손은 애꿎게 담배만 연신 물었다. 저 멀리 아파트들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강남구 삼성동.








 쯧쯧…노파의 마음(1985년 6월 서울 송파구 오금동)


 외로운 섬처럼 올라앉은 마을. 메워진 논두렁에 며느리와 함께 주저앉은 노파는 마실나온 것도 잊은 채 하릴없이 마을만 올려다본다




 

1982. 3. 서울 강남구 대치동.


 년 전 대치동엔 아파트와 논밭이 공존했다. 은마아파트 앞 밭두렁. 대치동 토박이 아낙네들이 외출했다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올림픽공원이 들어설 자리(1983년 8월 서울 송파구 오륜동)


서울에서 성남과 광주를 오가던 버스 길. 88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올림픽 촌을 건설했고, 이 자리는 현재 올림픽파크 호텔이 들어섰다 









 저 아파트들엔 누가 살까?(1981년 6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아이를 하나씩 들처업고 저녁 마실나온 아낙네들. 등에 업힌 아이들은 이제 20대 중반이 되었겠지



 

어린 소년의 사색(1981년 7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친구들아 어디갔니? 어느새 아스팔트 길이 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떠났다







돌담길 작은소녀(1982년 6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돌담마을, 감나무집…돌담길 아래서 배시시 웃던 상고머리 소녀. 30대 중반이 되었을 그녀의 어릴적 집은…



 

정씨댁 제삿날(1980년 6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맷돌에 두부콩을 갈고 앞마당에서 빈대떡을 부쳤다. 꼬마도 “할아버지 드시기 전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동네우물(1980년 8월 하남시 황산)


▷ 도대체 어떤날일까. 나뭇잎 툭툭 떨어지던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이 부산하다



 

어디 다녀오세요?(1981년 1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 정초가 가까운 어느 날, 눈이 소복 내렸다. 시집간 딸네라도 다녀오는지 머리에 보따리를 인 아낙이 동네 어귀로 들어선다



 

하교길 무얼 그리 바쁘신가?(1981년 5월 하남시 미사리)

​ 




김기찬, 송파구 삼전동 1982. 12. 12, Gelatin silver print, 50.8×40.6cm, 1982








새로운 보드를 찾았습니다.
디자인(어린시절..)
핀 273개
붕대
핀 51개
옛생각
핀 534개
여행
핀 27개
여행지
핀 10개
풍경&배경
핀 13개
인도풍경
핀 110개
밤하늘
핀 51개
여행지
핀 12개
요리
핀 129개
글 참고
핀 144개
영감을 주는 인용구
핀 47개
보드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