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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을 볼 때 일어나는 일들

by 이미행복 2020. 6. 10.



흑인을 볼 때 일어나는 일들


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흑인 차별을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EPA/연합뉴스 제공
미국 뉴욕에서 열린 플로이드 사망 항의시위. 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흑인 차별을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EPA/연합뉴스 제공

 

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최초 우주 궤도 프로젝트에서 크게 공헌했던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의 실제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이 지난 2월 24일 102세로 영면했다. 

 

영화에서 재현한 당시 인종 차별 관행은 끔찍한데, 존슨(타라지 헨슨)은 사무실 내 커피포트는 물론 화장실도 백인들과 같이 쓰지 못했다. 존슨은 화장실을 한 번 이용하려면 흑인 전용 화장실이 있는 800m 떨어진 건물까지 다녀오느라 수십 분을 써야 했고, 바쁜 와중에 존슨이 장시간 자리를 비워 화가 치민 본부장 알 해리슨(캐빈 코스트너)은 결국 폭발한다. 

 

그러나 존슨의 항변으로 충격적인 진상을 알게 된 해리슨은 해머를 들고 흑인 전용 화장실로 가 푯말을 부순 뒤 “NASA에선 화장실 구분은 없다!”고 선언한다. 이 영화의 명장면인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반세기 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흑인 차별의 심리적 배경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무릎에 목이 눌려 죽는 사건을 발단으로 벌어진 시위를 지켜보면서 미국의 흑인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과학기술이 부여한 힘을 바탕으로 한 백인들의 유럽 제국주의가 만든 인종(유색인) 차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필자가 굳이 ‘흑인 차별’이라고 쓴 건 오늘날 흑인들이 겪는 차별은 우리를 포함한 다른 유색인이 받는 차별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종별 인구 구성을 보면 흑인이 14%, 아시아인이 7%다(참고로 백인이 60%, 히스패닉이 19%). 따라서 단순히 유색인 차별의 결과라면 백인 경찰에 억울하게 희생된 아시아인이 흑인의 절반은 돼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미국에 사는 한국교민이 200만 명이고 유학생, 어학연수생, 여행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지만 이들이 미국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규정한 악법들이 사라진 지도 오래됐고 간혹 스타벅스 같은 곳에서 인종 차별 사례가 발생하면 난리가 나는 시대가 됐음에도 유독 흑인들만은 여전히 끔찍한 차별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스탠퍼드대의 심리학자 제니퍼 에버하르트 교수에 따르면 이는 미국인의 뇌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흑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흑인(특히 건장한 남성)을 보는 순간 자동으로 폭력과 범죄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자칫 흑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 같은 이 같은 주장을 한 에버하르트 교수도 흑인이다. 우연이겠지만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3월 27일자에는 에버하르트 교수가 주장하는 ‘무의식적 편견’의 관점에서 흑인 차별 문제, 특히 경찰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다룬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에버하르트 교수는 지난해 흑인 차별 문제를 심층 분석한 책 ‘Biased(편견)’을 출간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기사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흑인 차별의 인지심리학을 들여다보자.

 

2017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의 실상이 잘 묘사돼 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수학 천재인 캐서린 존슨이 우주선 궤도 문제를 푸는 장면이다. 존슨은 지난 2월 24일 102세로 영면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제공
2017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의 실상이 잘 묘사돼 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수학 천재인 캐서린 존슨이 우주선 궤도 문제를 푸는 장면이다. 존슨은 지난 2월 24일 102세로 영면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제공

다른 인종 얼굴 잘 못 알아봐

 

1960년 생인 에버하르트는 초등학생 때까지는 ‘흑인 구역’에 살았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회사를 옮겨 이사하며 백인 사회에 편입됐다.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인종 차별(왕따)을 당할까 걱정하던 에버하르트는 급우들의 환대에 안도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서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급우들의 얼굴을 익히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백인 소녀들의 얼굴이 비슷비슷해 교정에서 같은 반 아이들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인종 효과(other-race effect)’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훗날 에버하르트가 심리학을 공부하며 인종 차별에 대해 인지심리학적으로 접근하게 된 출발점이 됐다. 우리의 뇌는 의지와 무관하게 일상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종과 다른 인종을 다르게 처리하게 구조화돼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생후 3개월 무렵부터 나타나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를 거치며 점점 더 두드러진다. 즉 학습을 통해 강화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이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뇌의 진화로 설명할 수 있다. 뇌는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인종을 쉽게 식별할 수 있게 얼굴 인식 회로를 구성하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인종 효과라기 보다는 ‘낯선 인종 효과’가 맞을 것이다. 한국 아기가 미국 백인 가정에 입양돼 백인 사회에서 자라면 아기 때부터 늘 보고 자란 백인들의 얼굴을 쉽게 식별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종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에 둘러싸여 사는 초등학교 교사는 같은 또래와 지내는 대학생들보다 어린이의 얼굴을 훨씬 더 잘 구분한다. 일상의 경험이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효율에 영향을 미쳐 인지능력을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훗날 차이나타운에서 소매치기를 일삼은 흑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에버하르트는 이들이 ‘다른 인종 효과’를 잘 알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동양인 중년 여성들을 주된 표적으로 삼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자신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경찰이 용의자들 사진을 보여줘도 피해자 대다수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흑인 = 폭력 + 범죄?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제니퍼 에버하르트 교수는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흑인 차별을 분석한 책 ‘Biased(편견)’을 지난해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스탠퍼드 대 제공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제니퍼 에버하르트 교수는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흑인 차별을 분석한 책 ‘Biased(편견)’을 지난해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스탠퍼드 대 제공

다른 인종 효과는 뇌의 또 다른 장기인 ‘범주화’ 능력과 결합해 특정 인종에 어떤 전형을 부여하는 무의식적 사고패턴으로 발전했다. 이런 현상의 부정적 측면이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이다. 불행히도 흑인들은 ‘폭력과 범죄’라는 암묵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펄쩍 뛰는 사람들도 흑인에 대한 암묵적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무의식적인 현상으로 특히 긴박한 상황에서 드러나기 쉽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흑인조차 흑인에 대해 암묵적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에버하르트 교수는 경찰서에서 종종 특강을 하는데, 강의가 끝난 뒤 경찰들이 찾아와 체험담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다음은 책에 나온 한 에피소드다. 

 

건장한 흑인 경찰이 하루는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편 유리창에 역시 건장한 흑인 남성의 모습이 비치는 게 아닌가. 행동이 심상치 않게 보여 신경이 쓰였는데 자신이 이동하자 그 남자도 따라 이동했다. 긴장한 경찰은 걸음을 빨리했고 그 남자도 걸음이 빨라지다 순간 사라졌다. 당황한 경찰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건너편 건물로 급히 이동했고 순간 그 건물 유리창에 그 사람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경계하며 지켜본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에버하르트 교수는 몇몇 기발한 실험을 통해 흑인에 대한 암묵적 편견이 우리의 지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밝혔다. 2004년 학술지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에 실린 논문에 나온 권총 식별 실험을 보자. 참가자들(경찰과 대학생)은 모니터에서 점으로 이뤄진 해상도가 낮은 그림을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상도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그림이 뭔지 알아차리는 순간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림이 권총일 경우, 화면에 순간적으로 흑인 얼굴을 끼워 넣으면(참가자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림을 더 빨리 식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백인 얼굴을 끼워 넣을 때는 이런 효과가 없었다. 반면 그림이 라디오일 경우는 흑인 얼굴도 효과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흑인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의 무기일 수 있는 권총에 대한 식별력이 높아진 것이다. 이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훈련을 받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검문 중 일어난 흑인 사망 사건 가운데 이들이 총을 꺼내려고 한다고 오해한 경찰이 총을 쏜 사례가 많은데, 위의 실험결과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의 실험은 암묵적 편견 ‘덕분에’ 부족한 정보로 올바른 추측을 빨리 한 경우이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암묵적 편견 ‘때문에’ 부족한 정보로 틀린 추측을 빨리 해 비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모니터에서 점으로 이뤄진 해상도가 낮은 그림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해상도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참가자들은 그림이 뭔지 알아차리는 순간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림이 권총일 경우, 화면에 순간적으로 흑인 얼굴을 끼워 넣으면 그림을 더 빨리 식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 제공
모니터에서 점으로 이뤄진 해상도가 낮은 그림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해상도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참가자들은 그림이 뭔지 알아차리는 순간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림이 권총일 경우, 화면에 순간적으로 흑인 얼굴을 끼워 넣으면 그림을 더 빨리 식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 제공

 

 

반복적인 훈련으로 극복해야

 

흑인 차별이 암묵적 편견이라는 강력한 무의식적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닐까. 에버하르트 교수는 이를 바꾸는 게 쉽지 않다고 인정하며 따라서 사회적 차원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경찰들은 긴박한 순간에 암묵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도록 반복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흑인 차별 사고를 많이 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경찰서는 2014년부터 에버하르트 교수와 함께 경찰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먼저 경찰들의 교통 단속 장면을 분석했다.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18세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훔치려다 백인 경찰의 총을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경찰의 과잉 대응을 막기 위해 경찰은 몸에 카메라, 보디캠을 차기 시작했다. 경찰 대다수가 처음엔 신경을 썼지만 어느 사이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평소 행동으로 돌아갔다. 

 

경찰 245명의 보디캠에 기록된 981건의 차량 검문 대화를 분석한 결과 경찰들이 흑인 운전자와 백인 운전자에게 사용하는 말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에버하르트는 같은 대학의 언어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말의 존경도를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 흑인 운전자에 대해서는 “손을 핸들에 얹으시오” 같은 명령조가 많은 반면 백인 운전자에 대해서는 “미안합니다만...” 같은 말투를 썼다. 

 

한편 흑인들은 사소한 위반에도 검문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오클랜드 시민의 28%인 흑인이 검문 건수의 60%를 차지했다. 설문 조사에서 경찰들은 검문의 90%가 엄격한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 비디오를 분석하자 그런 경우는 5%에 불과했다.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재교육을 실시한 결과 2018년 검문 건수는 2016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흑인 운전자 검문 건수도 43%나 줄었다. 

 

에버하르트 교수는 경찰 재교육에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적용해 이들이 긴급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하고 범인 추적 및 체포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는 전략을 짜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오클랜드에서 경찰 총격 및 이로 인한 부상이나 사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도 있다. 매년 100명이 넘는 경찰이 총에 맞아 죽는 현실에서 “내가 살려면 때로는 불가피하게 과도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미국 전역으로 시위가 퍼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일어나자 교민 사회에서는 한때 1992년 LA폭동이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왔다고 한다. 다행히 약탈은 수그러들었고 지금은 평화시위가 미국을 너머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 공권력도 태도가 바뀌는 조짐이 있어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누르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 여러 조치가 실행되거나 준비되고 있다.

 

물론 공권력만 바뀐다고 흑인 차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흑인 차별은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심지어 흑인들조차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 교수가 “동네나 일터, 학교에서 인종 다양성을 크게 하는 게 도움이 된다”며 “아울러 편견을 없애는 교육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문득 인종 차별이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종 차별 문제가 심심치 않게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우 백인에 대한 ‘우대’와 유색인에 대한 ‘하대’로 나뉘는 것 같아 더 씁쓸하다(우리도 유색인이면서). 인종에 기반한 편견이 뿌리내려 미국 같은 중증의 상황이 되기 전에 정부의 정책개입과 개인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